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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입양인 또 추방위기…LA 총영사관 이민당국에 선처 요청

LA총영사관이 한국으로 추방될 위기에 놓인 한인 입양인를 위해 또 이민당국에 선처를 요청하고 나섰다. 총영사관 관계자는 24일 입양아 출신인 한인 K씨가 추방판결을 받은 것과 관련해 이민당국에 재고 요청 서한을 발송했다고 밝혔다. K씨는 8세 때인 1975년 미국 양부모에게 입양돼 성장해 오다 30세가 되던 1997년 횡령.사기.허위사실 유포 등의 혐의로 추방판결을 받았다. 이후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곧바로 도주생활을 해오다 13년만인 지난해 경찰에 다시 체포됐다. 현재 라스베이거스 추방자 억류소에 수감돼 있다. 이민당국은 K씨를 추방하기 위해 LA총영사관에 임시 여행증명서를 신청했다. 하지만 LA총영사관은 발급을 유보하고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선처해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24일 발송한 것이다. K씨는 고아원에서 미국가정에 입양돼 한국에는 연고가 전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한국말도 전혀 구사하지 못하고 한국을 방문한 적도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K씨는 추방결정 취소를 위해 직접 항소한 상태다. 총영사관 관계자는 "양부모들이 입양후 시민권 신청을 해줬으면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텐데 안타깝다"며 "이민당국에서 선처해준다고 해도 K씨는 범죄기록 때문에 시민권 취득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 달 말 본보에 보도됐던 또다른 한인 입양아 서 모씨(31.여) 추방판결에 대해 LA총영사관측이 이민당국에 사면요청한 결과 서씨는 지난 18일자로 일단 귀가 조치된 것으로 확인됐다. 서씨는 생후 8개월만에 미국으로 입양돼 2008년과 2009년 2건의 절도죄로 추방 위기에 놓였었다. 총영사관은 서씨가 입양 후 한국에 가본 적이 없었던데다 가족이나 친척이 아무도 없어 한국으로 돌아갈 경우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점과 남편없이 3명의 자녀를 혼자 양육해온 그가 추방되면 미성년자인 자녀들의 거취에 문제가 생긴다며 추방조치를 고려해 줄 것을 당국에 요청했었다. 총영사관측은 일반 추방 사례는 많지만 입양 한인과 관련된 사례는 전혀 없다가 올해 들어 연속으로 2건이 접수됐다고 밝혔다. 김병일 기자 mirsol@koreadaily.com

2011-02-24

"아이들 정체성 찾아주고파"…아이타스카 한글학교 입양아반 딘 씨 가족

제프-질 딘 부부는 아이타스카 한글학교 내 입양아반을 개설하는데 1등 공신이다. 입양아 캠프에서 이현애 교장을 만나 입양아 전문반의 필요성을 호소했고 부모와 함께 하는 수업 방식도 제시했다. 덕분에 4주 전부터는 자녀 애비게일(12), 조셉(10)과 함께 전 가족이 한글학교를 다니고 있다. 질 씨는 “부모가 한글을 이해할 수 없으면 일반 학교에 보내는 것과 다름 없다. 가족이 함께 배우는 과정에서 아이들에게 한국 문화가 중요하다는 메세지도 전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덕분에 아이들의 한국에 대한 흥미가 커져가고 있다. 애비게일은 “한국에 대해 알고 한국에 가면 어떻게 말해야 할 지 배우고 있어 수업이 재미 있다”고 말했다. 딘씨 부부가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기로 결심한 것은 한국식으로 아이들의 정체성을 찾아주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질 씨는 “언젠가는 아이들이 한국으로 갈 것이고 최소한 모국이 어떤 나라인지 알려주고 싶었다.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시작해 주는 건 부모의 역할이다. 하지만 미국식이 아니라 한국식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내 아이들은 코리안-아메리칸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딘 씨 부부가 에비게일을 입양한 것은 6년 전. 입양 역사가 길고 주위 한인 친구들로부터 정직한 나라라는 인상을 받았기에 두 아이 모두 한국에서 입양키로 했다. 딘 씨 부부는 입양 과정부터 아이와 모두 공유했다. 두 아이의 반응은 달랐다. 조셉은 적극적으로 친부모 찾기에 관심을 보인 반면 애비게일은 되도록 말을 아꼈다. 질 씨는 “모든 것을 아이들에게 맡기고 있다. 애비게일이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혹시 내 기분이 나쁘지 않을지, 자신이 거부된 것은 아닌지 등을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딘 씨 가족은 입양에 대한 주위의 시선이 바뀌었음을 느낀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입양아로 놀림도 받았지만 이제는 ‘old news’라며 개의치 않는다. 질 씨는 “국제가족에다 평범한 가정은 아니기에 어려움도 있었다. 입양 전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했다. 또 가족이 한 방식으로만 형성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주현 기자 kjoohyun@koreadaily.com

2011-02-17

"60년대 미국행 입양아 넘쳐나…라면박스에 담아 실어 날랐다"

"1년에도 수십번씩 핏덩어리들을 실어 날랐어요. '아저씨 서울로 돌아가요'라며 날카롭게 울부짖던 아이들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모두 건강하게 잘 컸는지…." 겨울만 되면 미국으로 떠나 보낸 입양아들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진다는 양수석 전 대한항공 기장(75.사진)은 아직도 자책감이 든다고 했다. 1960년 KNA(Korean National Airline.대한항공 전신)의 조종사로 첫 발을 내딛은 양 기장은 수천명의 전쟁고아.혼혈아.장애아들을 실어 보냈다.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서다. 김포에서 홍콩은 8시간 미국은 40시간이 걸렸다. 114개 좌석으로 이뤄진 비행기는 입양가는 아이들로 매일 만석이었다. 라면박스 하나를 6칸으로 나눠 고개를 가누지도 못하는 신생아들을 넣었다. 6~7살의 아이들은 비행기 타는 기쁨에 취해 어디에 가는 지도 몰랐다. "그때마다 해리 홀트(홀트아동복지회 설립자)씨는 비행기 밑에서 울며 기도했어요. 저를 비롯한 승무원들도 '가난한 조국을 원망해라'하며 많이 울었죠. 지금도 친부모 찾겠다고 한국에 오는 입양아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뭉클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비행을 물으니 그 역시 입양아들과의 추억이다. 1961년 11월 어느 비오는 밤에 그의 비행기는 태평양 한가운데서 멈출 위기에 닥쳤다. 엔진 4개중 하나가 꺼진 것이다 "약 200여 명의 입양예정아들이 비행기에 타고 있었죠. 이미 한참전 노리턴포인트(No-return point.귀환 불능 지점)을 지난 후라 '이대로 죽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한번 버림받고 또 다시 죽을 아이들이 너무 불쌍하더라고요. 미친듯이 '메이데이(mayday.조난 무선 신호)를 외쳤어요. 어떻게든 살리고 보자는 심정이었습니다." 천둥소리 엔진소음 아이들의 울음소리로 비행기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엄마'를 외치는 소리만 가득했다. 연료가 언제까지 버텨줄지 알 수 없었다. 더군다나 엔진 3개로 연료공급소가 있는 알래스카주 시미야(Shemya)까지 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이들의 울부짖음은 거세졌다. 요동치는 좁은 공간에서 아이들은 정말로 엄마가 필요한 급박한 상황이었다. 결국 양 기장은 규칙을 어기고 비행기를 돌려 일본 미사와에 있는 미군기지에 착륙했다. 이틀밤을 묵었다.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기지에 거주하는 미군부녀회가 총동원됐다. 아이들은 비로소 엄마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지금은 모두 어엿한 중년이 되어있을 것이라며 웃는 양 기장은 '잘 버텨줘서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고 했다. "어디있든지 건강하게 살아줘. 아저씨가 항상 기도하고 있다. 파이팅!" 구혜영 기자

2010-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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